칫솔을 버리면서 망설였던 날

2024. 6. 12. 23:02연애

달콤했던 연애가 끝나고 남은 자리는 지뢰 찾기와 똑같다. 생각도 못했던 부분에서 그리움의 스위치가 갑자기 터진다. 몇 년 전, 가장 아팠던 연애가 끝나고 다시는 집 근처에서 연애를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집안 곳곳에 있던 추억들 때문에 고작 화장실에 있는 칫솔을 버리면서 망설이고 말았다. 냉장고를 열면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료수가 보이고, 나는 보지도 않던 연애프로는 어느새 내가 가장 애청하는 프로가 되어있었다. 집에 가는 길 공기마저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시한폭탄처럼 터져버린다. 

 

이번에는 내가 사는 터전이 아닌 곳에서 연애를 했으니 괜찮겠지 싶었지만 아니었다. "난 다 좋아" 친구의 카톡을 보자마자 갑자기 그 사람의 말투가 연상이 되고 가라앉아 있던 그립다는 감각이 깨어났다. 밀려오는 그리움을 멀리 치워버리려 닫은 휴대폰 잠금 화면마저 그 사람이 찍었던 사진이다.

 

나는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가 좋았다. 주유소에서 기름만 넣고 자리를 떠나는 내 옆에서 건물이 멋있다며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것조차 근사하게 느껴져서 잠금화면이며 배경사진이며 바꿔놓곤 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그 사람이 보여준 포트폴리오를 보고는 그리는 세계가 아름다워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볼 때는 그냥 허름한 빌딩도 그 사람은 멋있다며 내게 보는 눈이 없다 핀잔을 주곤 했는데 그것조차 귀엽게 느껴져서 애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길을 가다 내심 나를 챙겨주고 아프면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모습에 작은 애정을 느끼고는 행복해했던 거 같다. 몸에 어울리지 않게 오동통한 볼살과 손가락도 생각이 난다. 

 

밀린 집 청소를 몰아서 하듯이 흔적을 지우려고 전화기록이며 카톡이며 내심 쿨하게 차단했다가 가슴 한가운데가 아려와서 다시 풀게 된다. 헤어짐을 고한 사람은 제 발이 저려서 본인을 숨겼다. 그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는 근처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거다. 내가 흔적 하나가 아까워서 몇 번이고 쓸어내리는 동안 그의 일상에서는 나의 모든 흔적을 다 지워지고 잊혀졌다. 프로필에 가득하게 담겨있던 사진들조차 사라져 나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이별을 고하고 내가 수긍한 순간 마음 속 한 줌의 부담마저 다 내던지고 새로운 사람에게 달려갔다. 방에 있는 모든 물건, 입고 있는 옷들은 내가 준 것이 분명하지만, 그 고마움과 이름표는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진 거다.  그 사람 곁에 내가 준 물건들은 남겨졌지만 함께 줬던 마음은 기억이 나지 않나 보다. 

 

내가 준 사랑만큼 되돌려 받았다면 지금 내 곁에 그때의 마음들이 남아 있을 텐데 사랑을 주는 것에 벅차서 받는 것을 너무 소홀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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